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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속의 서울의지
조선일보 <"기가막힌 팔·다리 만들겁니다 우리 모두가 똑같이 웃는 날까지…"> : 20090530
조회수 : 12434 | 2009-08-22

 

 

 

"기가막힌 팔·다리 만들겁니다. 우리 모두가 똑같이 웃는 날까지…"
[채성진이 만난 사람] '장애인의 손·발 만들기 30년' - 선동윤 ㈜서울의지 대표

고교때 아르바이트가 100억 매출 회사로
국내에만 절단 장애인 20만명쯤…번 돈 10분의 1 환원, 복지재단도 세워
IMF때도 無감원, 이직률 0%…월급날이면 전 직원 고기회식


소년은 늘 배가 고팠다. 머슴 일하던 아버지의 4남 1녀 중 둘째, 그에게 책가방 속 도시락은 사치였다. 잘해야 찐 감자였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을 때도 많았다. 전남 보성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소년은 대처(大處)인 광주로 떠났다.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의 의수(義手) 의족(義足)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도우며 혼자 힘으로 고등학교를 다녔다. 인연에 인연을 거듭하며 30년이 지났다. 석고 가루를 뒤집어쓴 채 의수족을 다듬던 소년은 지금 연 매출 100억원을 넘는 '대한민국 대표 보장구 회사'의 CEO가 됐다.

▲ 푸근한 인상이 좋아 보인다고 하자 선동윤 대표는“아침에 양치질할 때마다 거울을 보면서 웃는 연습을 한다”고 말했다. 선 대표가 자신이 제작한 의족 앞 에서 웃고 있다. 그의 표정이 미인 경연대회에 나온 심사위원처럼 보인다./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선동윤(宣東允·52) ㈜서울의지 대표는 팔 없는 장애인이 손가락을 구부려 책장을 넘길 수 있게 하는 의수를 만들었다. 걷기도 힘들다던 이들이 땅을 박차고 달릴 수 있는 스포츠 의족도 개발했다.여성 장애인이 치마를 입고 사용하는 하이힐용 의족도 만들었다. 몇 년 전에는 장애인 재단도 세웠다.


―왜 이렇게 연락하기가 힘듭니까.

"전국을 돌아다녀요. 직접 운전하는데, 1년이면 7만㎞쯤 뛰나 봐요. 택시기사가 한 달에 7000㎞ 한다지요."

―어릴 적 가난이 사무칩니까.

"원래 시골살이가 다 그렇지요. 아버지가 남의 집에서 일해주고 받은 삯으로 살았으니까. 소나무 껍질은 지금으로 치면 자연보호 못한 게고. 예전에는 자랑삼아 그런 얘기도 좀 했는데 이제는…."

―못 배운 한이 큽니까.

"보성에서 초·중학교를 나왔고 광주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젊은 시절엔 '돈 좀 있었으면 이 고생 안 하고 살 텐데'하고 생각 많이 했죠. 근데 저 지금 대학생입니다. 대불대 사회복지학과 3학년."

―의수족 일은 언제 처음 시작했는지요.

"고교 2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했어요. 광주 올라오면서 우유·신문 배달부터 잡일까지 안 해본 게 없는데 날이 추워지면 손발에 동상이 걸렸죠. 큰어머니가 '동상 안 걸릴 일'이라고 호남 의수족 회사를 소개시켜 줬어요. 어깨 너머로 배웠는데 손재주가 좋았는지 금방 따라 했어요."

―딱 7만원 들고 무작정 상경했지요.

"정확히 7만5000원이었어요. 월급 모은 것하고 주변 친지들 도움도 좀 받았죠. 1981년 2월, 서울역에 딱 내렸는데 무지 추운데다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당시 서울역과 광화문 주변에 의지(義肢) 공장이 한 20여곳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한 곳을 무작정 찾아갔어요."

-받아주던가요.

"당시는 그렇게 찾아가도 통했어요. 월급은 생각도 못하고 밥 먹여주고 용돈 좀 주시는 게 고마웠죠. 갈고리 찬 상이용사들이 많이 오셨는데 어찌나 무서웠던지. 공장 작업실 널빤지 책상 위에 신문지 한 장 깔고 몇 달을 살았어요."

-첫 제품을 만들어준 고객을 기억합니까.

"광주 시절엔 완제품을 만들 기술자가 못 됐었고. 서울 와서 첫 직장 사장님 의족이었나? 제 기술을 테스트하려 만들어보라고 시켰던 것 같아요."

-군대는 갔다왔나요.

"못 갔어요. 양쪽 발이 평발이라"

"여기 오시는 분들, 다들 진짜 힘든 사람들이에요. 절 보면서 편안한 느낌 받으시도록 저도 노력 많이 해요. 아침에 양치질할 때 거울 보면서 씨익 웃어보고. 부담 없이 저한테 짜증 내고 어려운 문제에 대해 하소연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드리는 거예요."

―원래 성격이 좋은 건가요, 노력해서 그렇게 된 건가요.

"저 원래 착한 놈이에요. 저도 사람인지라 속에서 뭔가 확 올라올 때가 있긴 하지만요. 저 한 번 화나게 해 보세요. 쉽지 않을 걸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중도 장애인들도 저와 30분 있으면 얼굴을 펴요."
선 대표가 다니던 회사는 일을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당시 그에게 의족을 해 갔던 고객 한 명이 일자리를 알아봐 줬다. 1947년 문을 열어 30여년 명맥을 이어온 보장구 제조 업체였다. 사장 윤금조씨는 오른쪽 다리와 왼쪽 발목이 없는 장애인이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까.

"운도 좋았고, 주변에서 저를 잘 봐주시기도 했죠. 장애인, 특히 절단 장애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던 때인데, 전 무릎을 꿇고 이 분들을 올려다보며 작업했어요. 그분들의 마음까지 읽으려 했다고 할까요. 다른 곳에서는 30분도 안 걸린다는 일을, 저는 두세 시간씩 땀 범벅이 돼서 해 드렸거든요."

―기술이 모자랐던 건 아닌가요.

"의수, 의족이란 게 입 속의 혀처럼 딱 맞기가 힘들어요. 어딘가 조금 안 맞는 듯하고 불편하고…. 그걸 이리 묻고 저리 재보면서 맞춰드렸어요. 평소 걷는 습관에 따라 발바닥을 깎아내는 각도가 다른데 이게 장애인 입장에서는 차이가 커요. 그때 감동했다는 분들이 아직도 저를 찾습니다. 새 직장을 소개한 분도 그중 하나였고."

―의족, 의수가 신체 기능을 얼마나 커버할 수 있을까요.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도 당연히 원래 신체의 기능을 따라갈 순 없어요. 발은, 절단 부위가 무릎 아래인 경우 최대 90%까지, 손은 30% 정도예요. 보장구 맞추러 오는 분들께 저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최선을 다해 만들겠지만 이걸로도 부족한 부분은 안 되는 것이라 각오하고 살아야 한다'고요."

선 대표가 자리를 옮긴 지 1년쯤 지난 1983년 어느 날, 윤 사장이 그를 불렀다. 당시 60대 후반의 나이였던 윤 사장은 "너라면 손님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며 회사를 맡아달라고 했다.

"당시 1억은 드렸어야 했는데, 2000만원 받으셨습니다. 20평짜리 아파트 한 채 값이었는데. 아내가 좀 보탰죠. 이후 15년 동안 윤 사장님께 매달 100만원 정도를 보내드렸습니다. 일터를 만들어주신 게 고마워서요. 돈을 좀 벌면 10분의 1은 장애인을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게 그 무렵입니다."

1991년 선 대표는 회사 이름을 ㈜서울의지로 바꿨다. 1998년에는 소재 개발에서 앞선 러시아 에너지아사와 기술 교류를 시작했다. 2004년에는 벤처기업 인증도 받았다. 직원들 월급을 주기 벅차던 회사 살림은 작년 기준 130억원대의 매출을 올릴 정도가 됐다.

선 대표의 공장 1층은 보행 분석실, 2층은 절단 장애인용 보장구 제작실이다. 3층부터 5층까지는 소아마비 환자용 보조기, 척추 보조기, 장애인용 신발 제작 부서가 있었다. 2층 보장구 제작실의 선 대표는 갖가지 연장을 익숙하게 매만졌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장인의 열정이 느껴졌다.

―구체적으로 어떤 보장구를 생산합니까.

"손은 수지(手指·손가락)부터 수부(手部), 전박(前膊·팔뚝), 상박(上膊·팔 위쪽), 견갑(肩胛·어깨뼈 부위)까지 커버합니다. 발은 족지(足指·발가락)부터 하퇴(下腿·종아리), 대퇴(大腿·넓적다리), 고관절까지고요."

―최근 개발한 제품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척추측만증을 교정하는 보조기가 있습니다. 요즘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 작업을 하다 허리가 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한국과 일본, 미국과 유럽 3개국 특허를 냈습니다. 4년 동안 6억원 들었습니다. 무릎 위쪽으로 다리가 절단된 분들이 편안히 걸을 수 있게 해주는 하이브리드 의족도 있습니다."

―품질이나 기술력은 어떤가요.

"각종 특허와 실용신안 30여건이 있습니다. 부품 제작이나 소재 부문에서는 좀 떨어지지만 조립해서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기술만큼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외국 제품과 가격 차이가 많이 나는가요.

"대퇴형 골격 의족 수입 제품은 1800만원까지 하는데, 우리가 만들면 500만원 안팎이면 됩니다. 기술의 국산화가 중요해요. 침대 생활을 하는 외국과 온돌방에 앉을 일이 많은 우리와는 환경부터 다르잖아요. 체중이 많이 나가는 외국인용 소재를 갖다 쓰면 우리 장애인들이 많이 무거워해요."

―절단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 외국과는 많이 다르죠.

"외국의 절단 장애인들은 남의 시선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요. 반바지 차림으로 의족을 내놓고 지하철 타고 다니잖아요. 우리는 의수나 의족 안 한 것처럼 감추려고 애쓰죠."

현재 국내 절단 장애인의 숫자에 대해 정확한 데이터가 없다. 자신의 장애 사실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선 대표는 "보건복지부 조사에서는 16만명쯤 된다는데 손가락 하나 절단된 사람까지 모두 치면 80만명까지 보는 사람도 있다"며 "저는 한 20만명 안팎으로 본다"고 했다.

그는 말없이 땀 흘려 일하던 '성실한 선씨' 때부터 인연을 이어온 고객이 2000여명에 달한다고 했다. 지금은 전국 6만여명의 고객이 선 대표의 보장구를 사용한다.

▲ 공장 작업실을 찾은 선동윤 대표(맨 앞)는 활기가 넘쳤다.“ 작업에 별 어려움은 없냐?”“출출하면 통닭 좀 사다 줄까?”직원들의 어깨를 주무르고 등을 두드려주기도 했다./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잊지 못할 고객도 있을 텐데.

"저랑 동갑인 친구인데, 천막 설치 작업을 하다 고압선을 건드려 두 손을 절단해야 했어요. 적잖은 보상금을 아내가 갖고 도망간 뒤 인생이 참…. 공짜로 의수를 해 드리는 고객이 됐죠. 양쪽 발을 동상으로 잃은 탈북자 여성도 있는데 북한에서 마라톤 선수였다고 했어요. 다시 걷게 됐다고 행복해 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대통령 표창을 받은 직원이 있다던데.

"정상민 부장인데, 여기서 의족을 맞춰가던 고객이었죠. 세 살 때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어요. 고등학교를 마칠 때쯤 우리 회사에 입사하라고 했어요. 최근 해발 4000~5000m급 히말라야 봉우리에도 두 번이나 올랐어요. 곧 백두산 등정에 도전합니다."

선 대표는 스포츠 보장구에 대해 관심이 많다. 2001년 스포츠 의족 전문팀을 만들었다. 스포츠 의족 육상 국가대표 조수현씨가 회사 직원이다. 작년 전국장애인체전 육상 단거리에서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를 목에 걸었다. 전국 각지의 트라이애슬론대회에 출전하는 철인 이준하씨도 마찬가지다.

선 대표는 작년 베이징 장애인올림픽에 참가한 캄보디아 육상 선수 킴 반나씨의 이야기를 꺼냈다.

"몇 년 전 캄보디아 사는 지인에게 들었는데, 지뢰 때문에 발목 잘린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직원을 보내 8명의 다리 본을 떠서 의족을 제작해 줬어요. 잊고 있었는데 이 선수가 베이징 대회에 출전해 '다리를 해 준 대한민국이 너무 고맙다'고 했다는 거예요. 운동선수인 줄 알았다면 그때 기능형 의족을 해 줬을 텐데. 뿌듯하면서도 아쉬웠어요."

서울의지에는 장애인 직원들이 많다. 전체 직원은 107명 중 35명이다. 산 대표는 "장애인이 회사를 부강하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라면서 "이들이야말로 회사를 평생직장으로 사수할 사람들"이라고 했다.

―장애인·비장애인 사이에 급여 차이는 있나요.

"전혀 없어요. 사실 제일 중요한 게 급여인데, 10년 차 기준으로 5000만원에서 5500만원 정도 돼요. 이 정도 주는 일자리, 쉽지 않죠. 이직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요."

―신입사원 면접 때 특히 눈여겨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 오는 고객 치고 심신이 괴롭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겠어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편안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돼요. 제가 관상을 잘 보는 건 아니지만 그건 보여요. 장애인들이 아무리 억지를 써도 웃을 수 있는 사람에게 점수를 줍니다."

―사원들 월급을 아직도 봉투에 담아서 준다면서요.

"어렵게 돈 벌어가는 가장들의 기(氣)를 조금 더 세워주자는 뜻이에요. 월급날인 13일은 무조건 전 직원 고기 회식입니다. 음식점 하나 빌리는 데 식대가 한 300만~400만원 나옵니다. 생산직 직원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고기 한 번 푸짐하게 먹이자는 뜻입니다."

―사회사업가 같습니다.

"당연히 '사업가'죠. 저희 식구가 107명인데, 4인 가족만 잡아도 400명의 생계를 제가 책임져야 합니다. 다행히 아직까지 사업하면서 큰 고비는 없었습니다."

―IMF 때는 어땠나요.

"괜찮았어요. 주문이 확 줄어들지도 않았고요. 감원은 없어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그건 이해 안 돼요. 지금 장애인 신발 만드는 부서에는 나이가 72세인 분도 있어요."

2005년 선 대표는 30억원을 종자돈으로 사회복지법인을 만들었다. 영세민·탈북 장애인을 위해 무료 보장구 지원 사업도 벌이고 있다. 그는 "무료 지원 사업은 내 삶의 의무조항"이라면서 "밥 벌어먹고 살게 만들어 주신 장애인들에 대한 도리"라고 했다.

연애 결혼한 그는 1남 1녀를 뒀다. 아들은 대학 인간재활학과 졸업반이고 딸은 고3이다. 아직 은퇴를 얘기하기엔 이른 나이지만, 선 대표에서 '포스트 선동윤 시대'의 서울의지에 대해 물었다.

―아들 전공이 아버지가 하는 일과 비슷한데요.

"아이도 제가 하는 일을 전공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아빠가 제일 존경스럽다던 녀석이었는데, 요즘은 생각이 좀 달라진 것 같아요. 환갑이 넘으면 일을 접고 아내에게 못 다준 사랑 나눠주며 마음 편하게 살랍니다"

―예전 윤 사장처럼 직원에게 사업체를 넘겨줄 생각은 있나요.

"회사를 넘겨준다고 해도 저는 한 사람에게는 안 줄 거예요. 공동 경영할 수 있도록 해야죠. 자수성가한 사람의 단점을 아세요? 다른 사람을 잘 못 믿는 거예요. 아들이라도 독점은 안 되죠."

선 대표는 앞으로 보장구의 영역이 한층 넓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교통사고나 산재 환자뿐만 아니라 당뇨·버거스씨병 등 갖가지 원인으로 신체 일부를 잃는 이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 65세가 넘어서면 누구나 어느 부분에서는 장애인이 된다"고 했다.

"실버 인구가 늘어나면서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는 접이식 보조기, 어느 곳이든 가볍게 밀고 갈 수 있는 워커(walker), 근력이 약한 노인을 위한 지지대 등 활용처가 무궁무진합니다."

공장 건물 밖에서는 간간이 빗방울이 흩뿌렸다. 60대 노인이 문을 열고 우산을 털며 들어오자,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15년 고객이라고 했다.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고요. 여기 앉아서 좀 벗어보세요." 어느새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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